효장세자(진종)의 어머니, 정빈이씨 묘 수길원

강근숙 파주작가

하늘을 가린 나무 사이를 걸어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면, 정빈 이씨의 원소 수길원이 보인다.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자리한 수길원은 조선 제 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된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1693~1720)의 원소이다. 정빈이씨는 이준철의 딸로 7살에 입궁하여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 1남 1녀를 낳고 궁중에 있을 때 심한 질병으로 장동에 있는 사가에 나가 치료를 하던 중 28세로 세상을 떠났다.

비공개인 수길원(사적 제359호)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좀처럼 볼 수 없는 토종민들레가 지천이다. 정빈이씨의 넋인 양 하얗게 피어있는 민들레는 시답잖은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신성함이 느껴진다. 왕의 여인으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정빈 이씨는 세 살배기 효장세자와 젖먹이 화순옹주를 두고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그해 1721년 몸이 약한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반대로 문안가는 것마저도 금지당해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던 시기였다. 그런 지경에 정빈 이씨가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원소 아래 수복守僕 인양 수길원을 지키는 향나무는 인생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구부정 허리를 굽히고 서 있다.

정빈이씨 소생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장녀는 일찍 죽고, 효장세자도 10살에 요절한다. 화순옹주는 성장하여 김한신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38세에 죽자 부군을 따라 죽음의 길을 택했다. 여인의 삶은 오로지 지아비에게만 있는 것일까.

부왕의 말림에도 식음을 전폐하고 기어이 남편을 따라갔다. 세상에 태어나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살다가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에 고귀한 사랑이라 여겼지만, 그렇게 따라 죽어야만 했을까. 지금은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지난날에는 남편이 죽으면 슬픔을 이기지 못해 따라 죽는 것을 최고의 열녀로 칭송했다. 조선왕조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烈女, 화순옹주는 조선시대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창적인 서체로 이름을 높이 세운 김정희金正喜의 증조할머니이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3년 뒤 인조 장릉長陵을 천장한다. 석물 틈에 뱀과 전갈이 있으면 후손이 요절하거나 장애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어, 오랜 논란 끝에 파주 운천리 대덕골에서 탄현면 갈현리로 옮기고 영빈이씨에게서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조상의 음덕이라고 기뻐했으나 훗날 세자는 불운한 삶을 마감하고,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시킨다. 세자가 왕이 되었으니 정빈이씨는 법적으로 정조의 할머니가 된다. 정조는 즉위하여 양아버지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할머니를 정1품 정빈으로 봉하여 묘를 수길원으로 올린다.

소령원지 부록에서는 정빈이씨의 묘표와 농대석籠臺石, 금화절목禁火節目등을 기술하며 수길원 식례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금상今上 무술년(1774,정조2)에 정빈묘를 수길원으로 봉하였다.’ 정빈이씨 묘를 원으로 승격시킨 사실을 적시한 뒤, 절향을 올릴 경우 희생을 담당하는 재축齋祝이 갖춰있지 않아 소령원에서 먼저 제사를 올린 뒤에 수길원 제사를 거행하였음을 말하였다.

*봉분 뒷편서 입구 방면

그리고 사헌부 관원과 대신의 의견이 정조正祖에게 가납되어 1789년(정조13)정월부터 가관假官을 임시로 파견하여 두 원소에서 별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언제까지 제사를 별도로 지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근래에는 소령원 숙빈최씨 기신제날인 4월 23일 함께 지낸다. 살아생전에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을 어려운 사이였으련만 소령원에서 제사상을 받는 정빈이씨는 시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는 것처럼 보인다.

수길원은 시어머니 숙빈 최씨의 원소 소령원昭寧園 진입로 오른쪽에 있다. 영조가 이곳에 묘를 쓴 것은 어머니를 곁에서 잘 모시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인이 안타까워 외롭지 말라고 그리 하였을까. 소령원은 성공한 아들을 두어 호강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 같고, 수길원은 그 반대로 안쓰러운 여인을 보는 듯 측은하다. 정빈 이씨 아들 효장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면 아마 어머니 원침을 이렇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식이 잘 되어야 죽어서도 그 자리가 번듯하다는 것을 두 원소를 보면서 생각한다.

수길원은 검소한 여인의 살림처럼 봉분도 아담하고 석물이 단출하다. 봉분 바로 앞에는 비석과 상석, 장명등이 일렬로 배치되었고, 양쪽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묘비 전면에는 ‘대한온희정빈수길원大韓溫僖靖嬪綏吉園’이라 새겨있고 뒷면에는 정빈이씨 이력과 장례 후에 석물을 세우고 담장을 두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왕이 되어서야 묘소에 명등明燈을 세우고 담장을 둘러 예를 갖추었다. 어제어필로 써서 비를 세웠으나 오래되어 획이 떨어져나가 1909년 11월 성기운이 칙령을 받들어 다시 썼다고 쓰여 있다.

*정자각 터

수길원은 여느 원소에나 있는 정자각丁字閣이나 비각碑閣이 없다. 주춧돌만 남아있는 정자각 터에는 자잘한 풀꽃들이 모여앉아 잔치를 벌이고 있다. 풀꽃 방석에 앉아 푸른 하늘을 이고 무심히 흘러가는 흰 구름 한 덩이를 바라보다, 그 옛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인을 그려본다.

3백여 년이 지난 지금 인간의 슬픔과 아픈 사연들은 세월에 묻히고 먼 산 뻐꾸기 소리 들리는 수길원은 평화롭기만 하다. 환영인가 남매의 손을 잡고 꽃밭을 거니는 정빈의 화사한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수길원 정문(비공개)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