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의 조성과 구조
공혜왕후 장지가 정해지고 묘소 역사가 시작되었다. 삼도감에 소속된 책임자는 28명이었으며, 부역군은 광릉光陵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1500명 정도였다. 산릉도감은 왕릉 현장에서 토목공사, 석물 조성과 조영 등 가장 힘든 역사를 담당하던 기관으로 인원은 각 도에서 몇백 명씩 동원되었다.
1474(성종 5)년 6월 2일 자시子時에 발인제를 지내고 재궁梓宮이 능지를 향해 떠났다. 왕비가 떠나던 날 하늘도 슬퍼서 비가 많이 내렸다. 상여꾼을 2백여 명을 더 뽑아 따르게 하였는데도 이튿날 미시未時가 돼서야 산릉에 도착했다. 혼령이 있을진대, 분명 언니가 마중 나와 동생을 얼싸안고 통곡을 했으리라.
순릉은 왕비의 신분으로 승하했기에 세자빈 언니의 공릉에 비해 구성물이 많다. 예전에는 관람객과 능역에 올라 석물을 보며 해설을 하였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에는 마음대로 올라갈 수가 없다. 순릉은 봉분 주위를 열두 방위를 나타내는 난간석을 둘렀고, 석양‧석호가 봉분 바깥쪽을 향해 2쌍씩 8마리가 배치되어 해설을 듣지 않아도 추존 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침 앞 장방형 상석은 제물을 차리는 곳이 아니라 혼이 나와 노시는 혼유석魂遊石으로, 상석을 바친 4개의 고석鼓石 역시 사악한 것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귀면鬼面을 새겼다. 양옆에는 수구水口를 막아준다는 망주석이 서 있고, 삼면에 곡장을 둘렀다. 봉분을 중심으로 한 석물이 놓인 이곳을 상계라 한다. 중계에는 가신 분의 명복을 빌며 자손 번창을 위한 장명등과 문석인‧ 석마를 배치했고, 아랫단 하계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무석인이 장검을 짚고 서서 능역을 지킨다.
순릉속지順陵續誌를 보면 그 당시 ‘능을 지키는 군인이 70명이고 1년에 번갈아 3일씩 돌아가며 번을 섰다’고 기록되었다. ‘급료는 한 명당 지급되는 땅(세금 없이 빌려 쓰는 땅)은 1구 50복이다. 중간에 본 읍에서 항상 정착한 사람에게만 12냥을 주기로 하였으나 병자에 없어졌다’ 쓰여 있다. 70여 명의 군사는 가까운데 사는 사람을 썼고, 급료는 땅으로 빌려주고 세금을 면제했다.
능지에는 수군에게 돌아가는 음식이며 말 먹이는 물론이고, 접시와 숟가락 숫자까지 자세히 적혀 있어 그때의 현황이 훤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 능군이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중종과 선조 재위 기간을 거치면서 순릉은 역대 왕들의 관심 속에 큰 변고 없이 보호될 수 있었다.



1648(인조26)년 2월, 순릉의 혼유석, 정자각, 월랑의 일부가 파손되고 문‧무인석의 코끝이 깨져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1645년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과 연관된 익명의 투서가 발견되었으나, 관련자는 색출하지 못하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인조는 즉시 능을 개수할 것을 명하였고, 석수石手 20명, 야장冶匠 2명을 동원해 작업이 시작되었다. ‘순릉의 문‧무인석과 석마 등은 본래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대신 규모가 작아졌다’는『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를 읽고 나서 석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조선의 석수와 대장장이들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아무리 들여다 봐도 보수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금천교를 건너면 홍살문이고, 그 앞에는 얇은 돌을 깔아 만든 향어로가 정자각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신로神路, 어로御路로 나누어진다. 신로는 제례 시 혼령이 가는 길이며, 어로는 참배자가 가는 길이다. 일반적으로 신로는 좌측, 어로는 우측에 한 단 낮추어 만들어졌으나, 순릉의 향어로는 높이 구별 없이 잡석이 깔려 하루빨리 원형복원이 되었으면 한다.
향어로 정면에 정자각이 있고, 양옆으로 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공간인 수라간과 능을 지키던 수복이 기거하던 작은방이 자리한다. 빈터만 남은 자리에 2012년 11월 수라간과 수복방을 복원해 능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자각 오른쪽에는 비각이 있다.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 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 전서로 썼고, 뒷면 음기에는 공혜왕후의 탄신과 책봉일, 승하일 등이 연대순으로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다. 순릉 표석 건립은 1817년 7월, 예조정랑 이덕빈과 선공감봉사 이최가 공릉과 순릉 표석을 세우자고 순조에게 장계를 올린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순조의 허락을 얻어 공사가 시작되었고, 약 두 달 후인 9월 13일 표석과 비각을 완성하였다. 공릉 조성 356년 만이고, 순릉 조성 343년 만에 두 능의 비석이 세워졌다.
온갖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열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성종의 원비, 무덤 속 공혜왕후는 혹여 지아비가 자신 곁으로 오려나 기다렸을까. 성종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월산대군은 34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6년 후 성종은 38세로 승하했다.

성종이 승하하자 연산군은 윤필상 등 대신들과 논의하여 작은 할아버지(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李璵) 묏자리로 왕릉 자리를 정했다.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 아버지 한명회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능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공혜왕후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성종과 이십 년을 함께한 계비 정현왕후는 장차 보위에 오를 진성대군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눈웃음을 날리는데, 누가 감히 원비와의 합장을 입 밖에 내겠는가.
순릉 비각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능상을 올려다본다. 넓은 사초지 너머 장명등 옥계석 윗부분과 무석인만 보일 뿐이다. 왕릉에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은밀한 왕비의 능침을 어찌 엿보려 한단 말인가. 옛날 같았으면 엉덩이가 너덜너덜하도록 곤장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 장례문화는 동서양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다. 배치된 석물 하나에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철학사상이 담겨 있다. 40만 평 아름다운 경관에 언덕과 숲이 어우러진 조선왕릉은 신선한 공기를 선사하는 파주의 허파이며, 살아 숨 쉬는 역사책이다.<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순릉-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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