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진종과 효순왕후의 마지막 안식처 ‘영릉’ -1편

6살에 세자로 책봉되고 10살에 요절한 추존왕

조선 왕릉 42기 중 영릉은 3기가 된다. 여주 능서면 왕대리에 세종과 소헌왕후 합장릉인 영릉英陵이 있고, 바로 옆 700m 떨어진 곳에 효종과 인선왕후 영릉寧陵이 자리한다.

파주 조리읍 봉일천에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맏아들 진종과 효순왕후 능이다. 진종 10살에 세상을 떠나 효장孝章이라 시호를 받았으며, 훗날 양자인 정조가 왕이 되어 진종으로 추존하고 무덤 이름도 영릉永陵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파주삼릉 매표소로 들어오면 바로 역사문화관이다. ‘파주삼릉역사문화관’이라 쓴 현판 글씨가 아무리 봐도 낯설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성종 글씨체라 하였다. 조선 왕릉 공간구성과 왕계도가 걸린 역사관에는 의궤에 기록된 영릉永陵 부장품 사진을 구경할 수 있다. 현궁에 관을 넣고 봉하는 왕릉 조성 절차와 효순왕후{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 영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1752년(영조 28년) 정월 스무하루 축시, 창경궁에서 현빈을 모시고 장지인 파주로 향하는 행렬을 영상으로 자세히 볼 수가 있다. 경기감사를 선두로 교명죽책요여, 책빈옥인현빈옥채여, 혼백영, 방상시, 소궤채여, 죽산마· 죽안마, 견여, 명정, 대여, 곡궁인 등 긴 장례행렬이 뒤를 따른다.

효순왕후 발인반차도를 영상을 보면서 왕가의 한 여인의 삶을 그려본다. 좌의정 조문명의 딸은 13세에 세자빈이 되었다. 윗전을 받들며 궁중의 예절과 법도를 배우느라 세자의 얼굴 익힐 사이도 없이 이듬해 청상이 되었다. 혼례를 올렸으나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세자빈은 모든 것이 자신의 박복한 탓이라 여기며 시아버지인 영조에게 공경을 다 하였다.

세자가 죽은 7년 후 현빈賢嬪으로 책봉되었고, 빈궁에서 홀로 지내다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현빈이 죽고 며칠 후, 영조는 효부 현빈에게 ‘효순孝純’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시호뿐만 아니라 묘지墓誌를 지을 만큼 며느리 사랑이 각별했다.

영조는 정비 정성貞聖왕후와 계비 정순貞純왕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고, 정빈靖嬪이씨에게서 효장세자가 태어난다. 영조의 즉위하자 경의군으로 봉해지고 다음 해 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한 세자는 9살에 풍양조씨 조문명 딸과 혼례를 올렸다. 세자는 나이답지 않게 언행이 젊잖고 기백이 있었다.

입학할 때나, 책봉할 때나, 관례를 치를 때나, 기운차고 명랑했는데, 이듬해 갑자기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정빈이씨는 세자를 낳고 3년도 되기 전에 명을 다하여, 어미 없이 자란 자식이라 아픔은 더했다. 자식 잃은 슬픔을 단장지애斷腸之哀라 했던가. 금지옥엽 귀한 자식, 왕통을 이을 세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조의 가슴이 찢어지고 소리 없는 통곡은 그칠 줄 몰랐다.

효장세자(1719~1728)가 요절하자 영조는 장릉長陵 천장을 단행한다. 조선조 제16대 인조 장릉은 임진각 가는 길목 운천리 대덕골이 있었는데, 영조 7(1731)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석물 틈에 뱀과 전갈이 있으면 자손이 요절한다는 말이 있어 오랜 논란 끝에 능을 옮기고 4년 후, 영빈暎嬪이씨에게서 사도세자(1735~1762)가 태어나 조상의 음덕이라 믿었다.

효장세자에 이어 책봉된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영특하여 훌륭한 군주가 되리라 믿었는데, 당쟁의 희생자가 되어 불운한 삶을 마감한다. 훗날 왕통을 이을 사도세자의 아들(이산:李祘정조)은 적대 세력으로부터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영조는 이산을 효장세자 양자로 삼아 세손으로 책봉한다.

영릉은 다른 능과 달리 비각이 둘, 비석이 셋이나 된다. 세자비世子碑는 ‘朝鮮國 孝章世子墓 孝純賢嬪祔左-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부좌’라 썼고, 1776년 3월, 정조正祖가 즉위함에 따라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는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무덤의 이름도 영릉陵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효장세자,효순비 표석 / 진종과 효순황후 표석 / 진종소황제, 효순소왕후 표석

진종으로 추존하여 정조가 친히 짓고 쓴, 영릉 비석은 ‘朝鮮國 眞宗大王永陵 孝純王后祔左-조선국 진종대왕영릉 효순왕후부좌’라 쓴 전서篆書가 예술이다. 비석 뒷면에 무덤 주인의 일대기를 적은 해서楷書는 또 얼마나 정교하고 이름다운지, 발걸음을 뗄 수가 없다. 음기 8행 끝부분에 ‘小子卽祚之九年乙巳월 일 謹書并篆-소자즉조지9년을사(1785) 〇월 〇일 근서병전’이라 적혔듯이, 이 글씨는 문예 군주 정조의 어필로 우리 고장 또 하나의 보물이다.<2편- 혹한 속 효장세자 영릉 묘역공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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