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8.5일부터 서울 및 경기지방에 1,100㎜ 이상의 국지성 호우가 발생하면서 우암산에 산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광탄면 용미4리 윤석한 이장은 주민 몇 명과 함께 계곡 하천에서 석축을 복구하고 있었다. 복구 중에 흙더미에서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기와를 발견했다.
윤이장은 동네에서 동국대학교 문화재관련 학과를 다니던 김경섭 대학생에게 보여 주었고 학생은 담당교수에게 전달하면서 조사가 시작됐다.
혜음원지 주변은 개경에서 남경(서울)을 가는 길목으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이다. 길목에는 혜음령이라는 높은 고개가 있어 산짐승과 도적이 자주 출몰하여 위험이 많았다. 이 고개를 무사히 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무기를 가지고 함께 출발해야만 했다.
1119년 고려 예종은 신하인 이소천이 건의한 대로 국가재정을 지출하지 않고 백성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사찰과 민가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소천은 묘향산에 있는 혜관스님을 만나 승려 1백여명과 경비를 마련하여 1120년2월에 착공하여 2년만인 1122년 2월에 혜음원을 완공했다. 그 후 왕의 남경(서울) 순행을 대비하여 왕이 숙박하는 행궁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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