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순릉-1편

공혜왕후의 생애와 왕실 

권력의 정점인 왕에게 다가가는 최고 방법은 왕가와 혼인을 맺는 것이다. 상당부원군 한명회는 네 딸을 모두 왕가와 명문 세도가에 시집보냈다. 첫째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는 신숙주 맏며느리가 되었다. 셋째는 해양대군(예종)에게, 넷째는 자을산군(성종)에게 시집보내 실로 두려울 게 없는 인맥을 형성했다. 왕위에 오른 예종이 14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 명에 의해 자을산군은 그날로 보위에 올랐다.

공혜왕후恭惠王后(1456~1474)는 조선조 제9대 성종의 원비로 아버지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어머니는 한성부윤 민대생閔大生의 딸이다. 공릉의 장순왕후 동생으로, 열한 살에 세자빈이 되어 성종이 즉위하자 단숨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어린 나이에 왕비에 오른 공혜왕후는 궁중 법도와 언행의 예를 갖추어 세조와 더불어 삼전(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계비 안순왕후)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전한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이조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여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 3개의 임시관청을 설치하여 국장을 분담한다. 빈전도감에서 습과 소렴 대렴 후, 6일째 되는 날 왕의 즉위식을 하게 되는데, 숙부였던 예종이 승하하자(1469년 11월 28일) 열세 살 자을산군을 그날로 임금 자리에 앉혔다.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적장자 제안대군은 4살로 너무 어렸고, 형인 월산대군은 몸이 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조비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이라는 설도 있으나, 덕종(의경세자)과 예종이 모두 요절했기에 세조의 튼튼한 기질과 담력을 빼닮은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렸는지 모른다.

성종은 조선 최초로 할머니 정희왕후 섭정을 받는다. 세 명의 왕비와 후궁 열네 명에게서 적자 2남 2녀, 서자 27명을 얻어 조선 역사상 자녀가 가장 많았지만, 왕비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성종은 무슨 연유인지 왕비를 찾지 않았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주도했던 아버지 공으로 왕비가 된 공혜왕후, 왕의 여자는 애틋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부부가 아니라 정략적인 관계이다. 어린 나이에 국모의 체통을 지키며 후궁들만 찾아가는 성종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왕비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예종에 이어 성종의 장인이 된 한명회의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무소불위로 권력을 휘두를 무렵, 왕비는 책봉된 지 5년 만에 병을 얻어 친정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실에서는 쾌차를 빌며 제사 지내고 죄수를 놓아주는 한편, 온 나라에 은전을 베풀었다. 날이 갈수록 병세가 깊어 궁궐에 다시 별전을 마련하고 지성으로 보살폈으나, 문병 간 한명회와 민씨 부인은 딸의 임종을 보아야 했다.

꽃다운 나이 19살 왕비는 자손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1474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도 살고 죽는 일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장순왕후는 열일곱 살에, 공혜왕후는 열아홉 살에, 두 딸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공혜왕후 순릉은 공릉 남쪽 산등성이의 서향 언덕이다. 언니인 장순왕후 공릉에서 가까운 거리이다. 요절한 자매가 저승에서나마 의지하고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한명회의 심중을 헤아린 것일까. 성종은 다른 곳을 검토하지도 않고 예조에 명하여 공릉 근처를 장지를 잡도록 하였다. 장순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나 같은 궐에 살지는 않았지만, 사가에서는 자매간이나 왕가에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였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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