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진종과 효순왕후의 마지막 안식처 ‘영릉’-2편

혹한 속 효장세자 영릉 묘역공사의 기록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高宗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개정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제정한다. 이성계가 조선 창업 후 4대조를 추존하였듯이, 황제국이 된 대한제국에서도 창업자(태조)와 고종황제의 4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에 대한 추존 작업이 이루어졌다. 1908년 7월 대한제국 순종 때, 정조의 법적 아버지 진종은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효순왕후는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다시 한번 추존되었다.

내게는 능참봉이 기록한 능지陵誌 복사본이 한 상자 있다. 2006년 서예가 동생은 파주삼릉과 소령원 수길원의 비문을 해석하고, 능참봉이 기록한 능지를 해석했다. 제각기 다른 능참봉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당시는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십수 년이 흐른 뒤 신기하게도 캄캄하던 원문이 눈에 들어왔다.

왕릉관리 전문가 조선의 능참봉들은 능의 모든 업무를 관리 감독하며 그 과정을 세세히 기록한 능지는 역사 글을 쓰는 내게 귀한 자료가 된다. 긴 세월 공‧순‧영릉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한 능지 ‘묘소도감의궤’에는 효장세자가 운명한 날로부터 예장이 끝나는 날까지의 기록이 낱낱이 적혀있었다.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귀한 자료가 워낙 많지만,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고 간략하게 인용하려 한다.

효장세자가 운명한 날, 이조吏曹에서는 인명부를 작성하고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 장례의 총 책임자 도제조는 영의정 이광좌이고, 그 외에 고위관료들이 50여 명에 이른다. 묏자리를 보는 관리, 장례절차를 보는 관리, 지리학 겸 교수, 사옹원, 사복시 등 각자 맡은 책임을 분담하여 왕의 재가를 받은 날까지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영릉의 ‘묘소도감의궤’를 보면 효장세자 묘역공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가 있다. 글 머리에는 세자의 사망일시를 기재한 후, 장지를 마련하고 시신을 매장하는 절차와 의례, 소모 물품 등을 적었고, 장례에 대한 목차 아래 담당자 직위와 이름, 일시를 밝히고 도감 업무를 빠짐없이 기재했다. 또한 석물과 정자각 설치에 필요한 재료와 동원된 일꾼의 품삯을 일일이 수록하였으며, 도감이 진행되는 절차를 날마다 보고하고 왕의 윤허를 받았다.

효장세자 묘소도감의궤 1쪽

효장세자가 운명하자 각 도에서 장정과 승군을 징발하였고, 묘역공사에 필요한 재목과 양식을 수송해왔다. 가장 추운 시기에 땅이 얼어 사초에 쓸 잔디를 떠서 싣고 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차 부역군은 경기도 120명, 강원도 210명, 충청도 260명, 황해도 160명, 전라도 380명, 경상도 370명이 파주 능역으로 모였다. 한겨울 추위에 제대로 입지도 못한 묘소 역군과 승군들은 동상자가 잇달았다.

춥고 힘들 때는 적당한 술기운이 약이 된다. 힘든 일과 추위는 술이 있어야 수월하다는 것을 아는, 영의정 이광좌와 좌의정 홍치중은 탑전에서 공사 중에 술이 극히 필요할 때는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영조는 곡식을 축내는 주범 술은 ‘불가하다’ 하였다. 먼 거리에서 자재를 운송하고, 무거운 돌을 올 메어 끌어올리는 능군들은 혹한에 움막에서 떨면서 지냈고, 변변히 입지도, 먹지도 못한 채 묘역공사에 정성을 쏟았다. 고생한 일꾼들에게 술이라도 먹이고 싶었으나 왕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40여 일 지난 기유년 정월 17일, 금주령을 엄격하게 국법으로 정했던 영조도 결국은 세자묘역공사에 소임을 다하고 돌아가는 일꾼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도록 허락했다.

효장세자가 운명한 무신년(1728) 11월 16일부터 기유년 정월 그믐, 묘역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본 도감에서 재가를 받아 쓰고 남은 돈을 대충 확인했다. 무연탄값이 246냥 6전이고, 갈탄값 85냥, 담배값은 13냥 3전 5푼이다. 말값馬稅은 쌀 72석 14두, 수레값 116석 3두 6승, 나무 4동 7필과 개인이 갖고 있던 목물木物값 725냥 3전, 나무 6동 17필 15척 7촌 5푼으로 합한 값 1,070냥 2전 5푼, 나무 10동 24필 7척 5푼, 쌀 189속 2두 6승 등은 도감으로부터 가져다 썼다.

상의원 누주樓柱 36조, 수어청 재목 98조 중 서까래 19개, 돈 500냥, 나무 2동, 포 6동, 콩 2석, 쌀 200석은 왕세자 발인에 사용하였음을 호조에서 확인하였다. 하교한 대로 각 읍 군병과 세도감 역원과 군장 등이 추위를 막는데 사용한 것이 쌀 38석 7두 1승, 쌀 161석 7두 9승을 봉납하였다.

능지陵誌 하청기명기下廳器皿記 원문을 보다가 평민이 쓰는 농기구나 살림살이 이름까지 모두 한자라는 것이 놀라웠다. 밥솥은 식정食鼎, 국솥은 각쇠脚釗, 궹이는 광이光耳, 낫은 겸자鎌子, 가위는 전자剪子, 빗자루는 추일箒一, 요강은 익항溺缸 등등 수없이 많았다.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우리 글을 언문이라 업신여기고 한자만을 사용했다. 세종께서는 어려운 한자를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없음을 가엾게 여겨,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한글을 온 나라에 반포했다. 한글 창제 370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도 관가에서는 아녀자가 쓰는 그릇조차 우리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어려운 한자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다소 지루한 감이 있어도 이런저런 얘기를 길게 나열한 것은, 내 고장에서 국장을 치른 생생한 실록이며, 문화유산을 바르게 이해하고 보존하는데 귀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영조의 발자국이 수없이 찍혔을 능상을 올려다본다. 피기도 전에 떨어진 꽃봉오리, 어린 나이에 가례를 올리고 세자는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부부간의 애틋한 정도 모르는 채 외로운 섬처럼 궁궐에 남겨진 세자빈은 차라리 요절한 남편을 따라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권력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왕가로 시집갈 리 만무하고, 평생 외롭지도 않았으리라. 왕가의 여인은 고독하다. 혼례를 올리고 합방도 하지 못한 효순왕후는 죽어서야 진종 옆에 나란히 누웠다

파주삼릉 주인들은 단명해서 애달프다. 공릉의 장순왕후는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증으로 17세에 죽었고, 순릉 공혜왕후는 후사 없이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 러울 것 없는 왕실 가족이 되어 왜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살고 죽는 일은 하늘의 뜻이라 해도 너무나 안타까운 삶이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파주삼릉의 왕과 왕비는 몇백 년 세월이 흐른 뒤,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1편 -6살에 세자로 책봉되고 10살에 요절한 추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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