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해병대의 사천강 전투

강근숙 파주작가

고향 잃은 실향민이 조상님 그리워 찾아오는 임진각, 너른 마당 평화누리에는 ‘해병대 장단 사천강지구전투 전승기념비’가 세워졌다. 어느 날, 갓 입대한 해병대원 20여 명이 꽃바구니를 안고 와서는 전승비에 헌화하러 가는 길이라며, 임진강 주변 관방유적 해설을 요청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장단지구는 한·미해병대가 배치되어 1952년 3월 17일부터 이듬해 정전협정까지 1년 4개월간 사투를 벌인 곳이다. 4차례에 걸쳐 중공군을 격퇴한 해병대 사천강 전투는 수도 서울의 관문을 사수한 청사에 길이 남을 대혈전이었다.

임진강이 국경 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전을 벌였으며, 요충지에는 산성과 보루가 그대로 남아있다. 외세의 침략을 받아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벌어진 격전지 임진강 주변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와 숱한 무용담이 남아있다.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파주는 그날로 쑥대밭이 되었고,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공산군에 점령되었다. 두 달도 안 되어 국토는 10%밖에 남지 않아 학생들은 가방을 내던지고 전장으로 달려갔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북한군과 맞서 써우던 아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에 국군과 유엔군은 목숨 걸고 방어선을 지켰다.

우리 군과 유엔군은 공격과 후퇴를 거듭하며 중공군을 서울에서 퇴각시켰으나, 곧이어 중공군 18만과 공산군 총병력 69만 명이 전선에 재투입되었다. 중공군의 증원으로 전선에서 철수한 유엔 지상군은, 기어코 문산 북방으로 집중공격하여 공산군 6천여 명을 격멸시켰다. 

1951년 7월, 전쟁을 끝내려고 휴전회담이 오고 갔다. 남과 북은 서로 좋은 곳을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였으며, 이미 두 번이나 수도를 빼앗겼던 남한은 수도 서울을 지키느라 전력을 다했다. 판문점에서 사천강 11킬로 경계를 대치하며 사투를 벌여 1만 4천 명의 적을 사살하고 서부전선을 사수했지만, 우리 해병 776명이 전사하고 3,214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처절한 전투였다.

통신이 끊기고 실탄도 떨어졌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한다’는 김용호 소대장의 외침 속에 사천강 주변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김 소위는 4차 전투에서 75명의 병력으로 역습하여 115명의 중공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적군과 아군의 시체가 뒤엉켜 피비린내 나는 참상 속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소대원 70여 명이 전사한 것을 확인했다. 대원들을 잃어버린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김 소위는 사랑하는 대원들이 잠든 고지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김용호 소위의 사연에서 민족의 비극이 느껴진다.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시작한 군사회담은 2년이 넘는 동안 계속되었고, 158번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선의 포성은 멈췄으나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 238킬로에 1,292개의 나무 팻말이 세워졌다.

<위 사진: 북한군 초소>

사천강 전승비에는 치열한 전투 장면을 새긴 양각화와 헌시, 776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졌다. 수많은 전사자 명단 중앙에 ‘김용호’란 이름이 눈에 들어와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본다. 여기 빼곡하게 적힌 전사자 한 명 한 명은 부모에게는 금지옥엽 귀한 자식이고, 어느 여인에겐 하나밖에 없는 지아비였으리라. 해병들이 호국영령들께 묵념을 올리는 것을 바라보며, ‘사천강 전투에 산화한 해병들도 저리 꽃다운 젊음이었겠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해병 제1상륙사단 전공선양비

수도 서울과 파주의 수호신, 해병대여! 
모래가 세월을 씻어주는 파주 장단 사천강 
핏빛 절규와 아우성이 스러진 
그곳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가장 빛나는 역사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사즉생死卽生 해병 정신으로 사수해온 터전 
모랫속 켜켜이 쌓인 염원, 오직 조국! 

안보의 성지聖地에 호국영령 새기니
해병대원 이름 하나하나 별이 된다. 

밤낮없이 무적 해병 호위받으며 
이제 우리가 대한민국 평화를 지켜나가리.

자유 조국의 수호신이 된 776명의 젊은 영령들이여! 
그대들의 투혼과 공훈은 이 겨레와 더불어 영원무궁하리라!

대한민국의 허리 파주는 유독 전쟁의 상처가 많은 지역이라 곳곳에서 전적비를 만난다. 조리읍 능안리 도로변에도 ‘해병대 전공 선양비’가 세워졌다. 해병 제1 상륙 사단은 6·25전쟁 중 장단 사천강 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퇴해 수도방위에 큰 공을 세웠다. 

그 외에도 인천상륙작전, 함흥지구작전, 김일성고지전투, 서울탈환작전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려 귀신 잡는 해병으로 만천하에 위용을 떨쳤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말은, 참전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물불 안 가리고 용맹하게 싸우는 해병대에 감탄해 격찬한 말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했던가. 

제1상륙사단은 그 후 증편된 해병 18,000여 명은 1959년까지 8년간 파주 금촌에 주둔하면서 적군의 침공과 도발을 저지하는 한편, 대민 지원과 전후 복구 사업으로 파주가 번영할 수 있도록 주민을 도왔다.

나는 전쟁세대는 아니지만, 전쟁과 피난살이를 겪은 부모님으로부터 참혹했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선친은 인민군에게 북으로 끌려가다 ‘뒤보러 간다’ 뒤처져 나무에 올라가 죽을 고비를 넘겼고,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잡혀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무에 올라가 살아났기에 전쟁 후에 태어난 내 이름에 뿌리 근根 자를 넣어 지었고, 동네 사람들이 남쪽으로 꽃놀이를 간다 해도 “아랫녘은 바라보기도 두렵다”며 가지 않으셨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빼앗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렇게 잘사는 것은, 조국을 위해 몸 바친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도라전망대에 올라서면 1,5킬로 떨어진 역삼각형 사천강이 보인다. 사천강 좌우로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그 뒤편으로 북한군 212초소와 개성공단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사천강 지구 전투에서 해병대가 목숨을 바쳐 싸워 수도 서울의 관문인 서부전선을 지켜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대도 도움이 되었다. 

75년간,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비무장지대는 6천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평화의 땅으로, 겨울이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멸종위기종 야생생물 2급이자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 보금자리가 되었다. 피로 물들였던 사천강은 동족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남으로 흘러 임진강과 손을 잡는다.

개성공단과 2시 방향으로 보이는 개성시, 역삼각형은 사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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